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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역사이야기

[역사] 낙화암에서 떨어진 의자왕의 삼천궁녀 사실일까?

by 불빛_ 2019.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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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암에서 떨어진 의자왕의 삼천궁녀 사실일까?


백제는 660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게 되는데

이때의 백제 마지막 왕이 바로 의자왕입니다.

의자왕은 처음에는 나라를 잘 다스렸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방탕한 생활로 나라를 망하게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는 의자왕을 떠올리면 삼천궁녀도 같이 떠올리게 됩니다.

삼천궁녀 때문에 의자왕이 우리에게 더 기억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삼천궁녀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과연 의자왕과 삼천궁녀의 진실은 무엇일까요?




삼천궁녀 이야기가 사실이 아닌 이유

삼천궁녀 이야기는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의 사비성이 함락되자 

의자왕의 궁녀 3,000명이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 때문에 의자왕은 여자와 술만 좋아한 왕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결론을 먼저 얘기하자면 '삼천'궁녀의 이야기는 사실이 아닙니다.

먼저, 백제의 궁녀는 3,000명이 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수도인 사비성의 인구는 5만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노약자, 어린아이를 제외한 여성은 15,000명 정도로 추정할 수 있는데

그중 3,000명이면 15,000 인구의 1/5 수준인 엄청난 숫자입니다.

조선시대의 궁녀 수가 많아야 500~600명 정도였다고 하니

3,000이라는 숫자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숫자인지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당시 기록 중에 '삼천'궁녀를 언급한 역사서가 없습니다.

삼국사기를 비롯해 어떤 역사서에도 삼천궁녀 이야기는 없습니다.

다만 삼국유사에 '부여 북쪽 큰 바위에서 궁인들이 떨어져 죽었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세 번째, 삼천궁녀를 처음 언급한 때는 조선시대

조선 중기의 문신인 민제인은 '백마강부'에서 삼천궁녀를 처음으로 언급합니다.

'구름 같은 삼천 궁녀 바라보며 후궁들의 고운 얼굴에 눈이 어두웠네'

여기에 등장하는 '삼천'은 정말 삼천명이었다는 뜻이 아니라

시를 쓰면서 숫자를 상징적으로 사용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단지 상징적으로 사용됐던 '삼천'이라는 숫자가 조선시대 문인들에 의해 유명해졌고

시간이 흘러 일제시대부터 삼천궁녀와 낙화암이 노래의 주제로 쓰이며

지금까지 우리의 기억 속에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결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에 신라의 삼국통일을 정당화하기 위해

멸망한 나라의 왕을 부정적으로 기록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실제 의자왕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의자왕과 달랐을 것이란 주장도 많습니다.


오늘 주제의 결론만 말하자면 의자왕의 궁녀 이야기는 사실일 수 있으나 

삼천명이란 숫자는 후대에 쓰인 상징적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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