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고국원왕이 미천왕의 시신을 전연에게 뺏긴 이유
고국원왕은 미천왕의 아들로 고구려의 16대 왕입니다.
고국원왕 때의 고구려는 내부적으로 큰 문제는 없었지만
국경을 맞대고 있는 모용선비의 전연과 근초고왕의 백제에 의해
힘들었던 시기이기 때문에 고국원왕을 비운의 왕이라고도 부릅니다.
이번에는 그중 전연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전연의 침략 |
전연은 선비족의 모용씨 모용선비가 요서 지방에 세운 나라입니다.
고구려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크고 작은 싸움이 있었고
고국원왕은 태자였을 때부터 이 모든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왕이 된 후 전연을 견제하기 위해 전연의 아래 위치한 후조와 연합을 꾀합니다.
또한 신성을 축조하고 국내성을 증축하며 전연과의 대결을 준비했습니다.
그 기간에도 전연은 점점 성장하여 중원으로 진출할 힘을 길렀고
자신들이 중원으로 진출했을 때 뒤쪽에서 고구려가 공격해 오면 힘들 것이라고 판단하여
342년 고구려를 먼저 굴복시키기 위해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공격하기로 결정합니다.
고구려를 침략하는 길은 두 가지로 북쪽 길과 남쪽 길이 있었습니다.
북쪽 길은 넓고 평탄했고 남쪽 길은 좁고 험한 길이었습니다.
고국원왕은 당연히 전연의 군대가 넓은 북쪽 길로 올 것이라고 생각하여
아우인 무에게 대군을 주어 북쪽을 막게 하였고 자신은 적은 병력만 가지고 남쪽으로 갔는데
이를 예측한 전연은 적은 병력만 북쪽으로 보냈으며 대부분은 험한 남쪽으로 진격하게 하였습니다.
고구려의 소수 병력은 전연의 많은 병력을 상대하면서 끝까지 버텼지만 이길 수 없었습니다.
결국 전연의 주력군을 막아내지 못하고 패했으며 고국원왕은 겨우 빠져나와 탈출하게 됩니다.
한편 북쪽에서는 고구려의 대군이 승리한 후 고국원왕을 돕기 위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당시 전연의 군대는 고구려 군대를 힘으로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대군이 도착하여 자신들이 고립되면 위험하다고 판단해서
더 이상 고국원왕을 추격하지 못하고 퇴각을 준비합니다.
이때 전연은 훗날 고구려와 유리한 위치에서 협상하기 위해
고국원왕의 어머니와 왕비를 데려갔으며 포로 5만 명을 잡아갔고
아버지인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 그 시체까지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그로부터 3개월 후 고구려는 스스로 신하라고 칭하며 진귀한 물건들을 바쳤고
겨우 전연으로부터 미천왕의 시신을 돌려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국원왕의 어머니는 13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에야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결론 |
그 후 전연은 중원 진출에 주력하며 스스로 황제국이 되어 힘을 과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서로 세력을 다투며 대립했던 전진에게 370년 멸망하게 되는데
이때 전연의 권력을 잡고 있던 모용평이 전진을 피해 고구려로 도망을 옵니다.
화가 난 고국원왕은 모용평을 잡아 전진에 보냈고 고구려는 전진과 우호 관계가 될 수 있었습니다.
고구려와 고국원왕의 고통은 이렇게 끝나는 것처럼 보였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근초고왕의 백제에 의해 다시 찾아오게 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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