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왕과 예식진, 백제 멸망에 관한 숨겨진 이야기
저번 글에 의자왕과 삼천궁녀에 대해 포스팅을 했었습니다.
(이전 글 - 낙화암에서 떨어진 의자왕의 삼천궁녀 사실일까?)
이번에는 약간 2편 느낌으로 백제 멸망에 관한 이야기와
의자왕은 왜 항복을 했는지에 대해 알아보려 합니다.
백제 멸망 과정 |
660년 당의 소정방이 이끈 13만 대군이 바다를 건너 넘어왔고
신라에서는 김유신이 이끈 5만의 군대가 공격해 왔습니다.
의자왕은 우선 계백에게 결사대 5천을 주어 황산으로 보내 신라군과 싸우게 했습니다.
그러나 계백은 전투에서 여러 번 이기고도 군사가 적고 힘이 부족해 결국 패합니다.
그 후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수도인 사비성을 포위하자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피신합니다.
지형적으로 방어하기 좋은 웅진성에서 시간을 끌면서 지방군을 모아 반격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나당 연합군은 백제의 성들을 무시하고 바로 사비성으로 진격해서 물자 보급이 힘들었고
백제는 지방 세력이 강해 많은 지방군이 그대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지방군이 도착할 때까지 의자왕이 시간을 끌면 어떻게 될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나당 연합군이 특별한 공격도 하지 않았는데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들어간지 며칠 만에 항복을 하고 말았습니다.
백제는 이렇게 멸망했고 의자왕은 당나라로 압송되어 그 해에 사망합니다.
의자왕과 예식진 |
중국 기록인 구당서와 신당서에는 백제의 장군 예식이 의자왕을 데리고 항복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 항복을 했다면 의자왕이 예식과 같이 항복을 했다고 기록되어야 맞는데
예식이 의자왕을 데리고 항복했다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예식이 의자왕을 배신하고 사로잡아 항복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2007년 무렵 중국에서 어떤 묘비명이 발견되면서 다시 관심을 받습니다.
여기에는 백제 출신 예식진이 당에서 좌위위대장군의 벼슬을 지냈다고 적혀있었으며
조부와 부친에 관한 기록 등을 따져봤을 때 예식과 동일인이라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비문에 다른 특별한 공적이 없었는데도 당에서 이 정도의 높은 벼슬을 지냈다는 것은
의자왕을 사로잡아 바쳤기 때문이 아니라면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예식진이 직접적으로 반란을 일으키거나 배신을 했다는 내용의 기록은 없지만
아마도 웅진의 관리였던 예식이 신라, 당나라와 협상을 했으며
이 때문에 물자 보급이 힘들어 전쟁을 빨리 끝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당 연합군은 웅진성을 바로 공격하지 않고 기다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결론 |
과정이 어쨌든 결과적으로 백제는 멸망했고 의자왕은 패배한 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자왕에 대한 평가가 뒤바뀔 수는 없지만
백제가 망한 결정적인 이유가 내부 배신이라고 생각한다면 씁쓸해지기는 합니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의자왕이 웅진성에서 지방군이 도착할 때까지 버티고 있었다면
백제가 멸망하고 일어난 백제부흥운동의 규모를 생각해 봤을 때
나당 연합군을 막아낼 수 있었고 백제 멸망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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