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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역사이야기32

[역사] 고구려가 멸망한 결정적인 이유, 연개소문의 죽음과 연남생의 투항 고구려가 멸망한 결정적인 원인 이유, 연개소문의 죽음과 연남생의 투항 660년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였고 그 후 8년 뒤인 668년 고구려 또한 신라와 당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고구려는 백제에 비하면 훨씬 큰 나라였습니다.그리고 이미 수나라와 당나라의 공격을 몇 차례나 막아내기도 했습니다.특히 수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에 국력을 쏟아부어 멸망했다고 보기도 합니다.이렇게 강했던 고구려가 멸망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제일 결정적인 이유는바로 연개소문의 첫째 아들 연남생이 당나라로 투항한 것입니다. 연개소문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등장하자 고구려에서는 당나라와 화친 정책을 폈습니다.고구려는 당의 요구에 굽신거렸고 연개소문은 이를 반대하며 귀족들과 갈등을 겪게 됩니다.귀족들은 연개소문의.. 2020. 1. 15.
[역사] 발해 무왕이 장문휴에게 당의 산둥반도 등주를 공격하게 한 이유 발해 무왕이 장문휴에게 당의 산둥반도 등주를 공격하게 한 이유 무왕 대무예는 발해 2대 왕으로 많은 분들이 알고 있는 대조영의 아들입니다.또한 무왕은 장문휴를 시켜 당을 공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무왕은 2대 왕이기 때문에 당시 발해는 생긴 지 40년 정도 밖에 안된 국가였습니다.이런 국가가 당시 강국인 당을 공격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흑수말갈과 대문예 대조영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무왕은 빠른 속도로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습니다.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밝히며 옛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해 나가자당은 흑수말갈을 이용해 발해를 견제하기 시작했습니다.흑수말갈은 발해의 동북쪽에 위치한 나라로 발해가 빠른 성장을 하자 당나라의 손을 잡게 됩니다.이 사실을 알게 된 무왕은 당나라와 흑수말갈이 힘을 합쳐 발해를 .. 2019. 12. 8.
[역사] 고구려 고국원왕이 미천왕의 시신을 전연에게 뺏긴 이유 고구려 고국원왕이 미천왕의 시신을 전연에게 뺏긴 이유 고국원왕은 미천왕의 아들로 고구려의 16대 왕입니다.고국원왕 때의 고구려는 내부적으로 큰 문제는 없었지만국경을 맞대고 있는 모용선비의 전연과 근초고왕의 백제에 의해힘들었던 시기이기 때문에 고국원왕을 비운의 왕이라고도 부릅니다.이번에는 그중 전연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전연의 침략 전연은 선비족의 모용씨 모용선비가 요서 지방에 세운 나라입니다.고구려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크고 작은 싸움이 있었고고국원왕은 태자였을 때부터 이 모든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왕이 된 후 전연을 견제하기 위해 전연의 아래 위치한 후조와 연합을 꾀합니다. 또한 신성을 축조하고 국내성을 증축하며 전연과의 대결을 준비했습니다. 그 기간에도 전연은 점점 성장하.. 2019. 11. 16.
[역사] 고구려 고국천왕의 뒤를 이어 산상왕이 왕이 된 이유 고구려 고국천왕의 뒤를 이어 산상왕이 왕이 된 이유 산상왕은 고구려 10대 왕이며 고국천왕의 동생입니다.고국천왕에게 뒤를 이을 자식이 없자 동생인 산상왕이 즉위하게 되었는데신기한 점은 산상왕 위로 형이 있었는데도 왕이 되었다는 점입니다.과연 산상왕은 어떻게 왕이 될 수 있었을까요? 우씨왕후와 고국천왕의 두 동생 우씨왕후는 고국천왕의 부인이었습니다.고국천왕이 197년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왕의 죽음을 비밀로 하고 고국천왕의 첫 번째 동생인 발기를 찾아갑니다. 우씨왕후는 발기에게 고국천왕의 죽음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발기가 다음 왕이 되는 데 도움을 주겠다고 제안합니다.하지만 발기는 어차피 자신이 다음 왕이 될 것이라 생각하여 우씨왕후의 제안을 거절합니다.오히려 밤늦게 자신을 찾아온 우씨왕후를 꾸짖었습니.. 2019. 10. 15.
[역사] 고려 태조왕건의 부인이 29명이나 되었던 이유 고려 태조왕건의 부인이 29명이나 되었던 이유 왕건은 918년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웁니다.그리고 936년 후백제와 마지막 싸움을 승리하고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합니다. 이렇게 후삼국 통일의 주인공이 된 왕건에게는 신기한 기록이 있는데그것은 바로 부인이 29명이나 된다는 것입니다.고려의 다른 왕들을 봐도 왕건만큼 부인이 많았던 왕은 없습니다.아무리 왕이었다지만 어떻게 부인이 29명이나 되었을까요? 태조왕건의 부인이 29명이나 되었던 이유 통일 신라 말에는 많은 호족들이 있었습니다.호족들은 각자 자기 지역을 다스렸으며 사병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몇몇 호족들은 세력이 매우 강했습니다.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나라의 기반을 다지고 백성들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서호족들과의 연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그래서.. 2019. 9. 22.
[역사] 의자왕과 예식진, 백제 멸망에 관한 숨겨진 이야기 의자왕과 예식진, 백제 멸망에 관한 숨겨진 이야기 저번 글에 의자왕과 삼천궁녀에 대해 포스팅을 했었습니다.(이전 글 - 낙화암에서 떨어진 의자왕의 삼천궁녀 사실일까?) 이번에는 약간 2편 느낌으로 백제 멸망에 관한 이야기와의자왕은 왜 항복을 했는지에 대해 알아보려 합니다. 백제 멸망 과정 660년 당의 소정방이 이끈 13만 대군이 바다를 건너 넘어왔고신라에서는 김유신이 이끈 5만의 군대가 공격해 왔습니다.의자왕은 우선 계백에게 결사대 5천을 주어 황산으로 보내 신라군과 싸우게 했습니다.그러나 계백은 전투에서 여러 번 이기고도 군사가 적고 힘이 부족해 결국 패합니다. 그 후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수도인 사비성을 포위하자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피신합니다.지형적으로 방어하기 좋은 웅진성에서 시간을 끌면서 지방군.. 2019. 9. 9.
[역사]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장사상륙작전의 비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장사상륙작전의 비밀 1950년 6월 25일 새벽 38선 전역에서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충분히 전쟁을 준비했던 북한군은 남진을 계속하였습니다.유엔은 북한의 공격을 '침략행위'라고 선언하고 멈출 것을 요청했지만북한은 이를 묵살하였고 미국과 유엔은 한국군을 지원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맥아더는 불리한 전세를 뒤집기 위해 인천 상륙을 준비하였고결국 인천을 탈환하고 서울까지 탈환하는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그런데 인천상륙작전 하루 전 적을 교란시키라는 임무를 받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그 사람들은 바로 장사상륙작전에 참여한 772명의 학도병입니다. 장사상륙작전 '낙동강 방어선을 점령하지 못하도록 북한군의 거점인 동해안 영덕 지구로 상륙하여적의 .. 2019. 8. 28.
[역사] 낙화암에서 떨어진 의자왕의 삼천궁녀 사실일까? 낙화암에서 떨어진 의자왕의 삼천궁녀 사실일까? 백제는 660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게 되는데 이때의 백제 마지막 왕이 바로 의자왕입니다. 의자왕은 처음에는 나라를 잘 다스렸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방탕한 생활로 나라를 망하게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는 의자왕을 떠올리면 삼천궁녀도 같이 떠올리게 됩니다. 삼천궁녀 때문에 의자왕이 우리에게 더 기억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삼천궁녀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과연 의자왕과 삼천궁녀의 진실은 무엇일까요? 삼천궁녀 이야기가 사실이 아닌 이유 삼천궁녀 이야기는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의 사비성이 함락되자 의자왕의 궁녀 3,000명이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 때문에 의자왕은 여자와 술만 좋아한 왕으로.. 2019. 8. 14.
[역사] 피바람이 불었던 세종대왕의 아들들 (문종, 세조, 안평대군) 피바람이 불었던 세종대왕의 아들들 (문종, 세조, 안평대군) 세종대왕의 가계도를 보면 수양대군이 왕이 되는 과정에서 많은 피바람이 불었습니다.문종의 아들인 단종을 비롯해서 안평대군, 임영대군, 금성대군여기에 계양군, 밀성군, 한남군, 영풍군 등도 관련이 있다고 하는데그중 문종과 수양대군, 안평대군에 대해서 간단하게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세종대왕 가계도 세종대왕의 아들들 문종, 수양대군, 안평대군 첫 번째, 문종 문종은 세종의 첫째 아들로 1450년 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습니다.정종, 태종, 세종 모두 첫째 아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조선 최초로 장자 계승을 한 왕이기도 합니다.재위 기간이 2년 밖에 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그냥 단명한 왕이라고만 알고 있지만문종은 1421년(세종 3년)에 세자로 책.. 2019. 7. 30.
[역사] 백제 성왕이 사비로 도읍을 옮긴 이유 사비천도 백제 성왕이 사비로 도읍을 옮긴 이유 사비천도 성왕은 백제 26대 왕으로 무령왕의 아들입니다. 백제 후기의 부흥을 이룬 왕이며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성왕의 업적 중에서 사비천도를 빼놓을 수 없는데 이미 한성에서 웅진(공주)으로 도읍을 옮겼던 백제가 또다시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긴 이유는 무엇일까요? 백제가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긴 이유 백제는 개로왕 시기에 고구려의 공격으로 한강유역을 빼앗겨 아들인 문주왕은 어쩔 수 없이 도읍을 웅진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이전 글 -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으로 도읍을 옮겨야 했던 이유 웅진천도 참고) 문주왕은 고구려의 남하를 막기 위해 방어에 유리한 웅진(공주)을 선택했던 것인데 웅진은 방어에는 좋았지만 비좁았으며 나라를 발전시키기에는 한계가 있었.. 2019. 7. 18.
[역사] 이성계가 요동정벌을 하지 않고 위화도회군을 한 이유 이성계가 요동정벌을 하지 않고 위화도회군을 한 이유 고려 말 이성계는 명나라의 요동을 공격하기 위해 떠났지만 공격을 해보지도 않고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여 돌아옵니다. 무슨 이유로 전쟁을 위해 떠났다가 그냥 되돌아왔을까요? 요동정벌 당시 중국은 원나라가 점점 힘을 잃고 몰락하였고 명나라가 중국 땅의 새 주인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명나라가 본격적으로 영토를 넓히기 시작하면서 철령 이북의 땅에 철령위를 설치하겠다며 고려에 영토 반환을 요구했습니다. 철령 이북 땅은 고려 땅이었지만 원나라 때 쌍성총관부가 설치되었던 지역으로 원나라가 힘을 잃어 세력이 약해지자 고려가 공민왕 때 되찾은 땅입니다. 당시 고려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최영은 명나라의 이런 요구가 고려를 침략하기 위해 압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강하게.. 2019. 7. 4.
[역사] 신라 선덕여왕이 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신라 선덕여왕이 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선덕여왕은 신라의 27대 왕으로 여성 중 최초로 왕이 되었습니다. 여성이 왕이 된 사례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우리나라 역사에서 딱 3명(선덕, 진덕, 진성) 뿐이며 이들은 모두 신라의 왕이었고 신라를 제외한 다른 나라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기에 여성이 왕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선덕여왕은 어떻게 최초로 여왕이 될 수 있었을까요? 선덕여왕이 왕이 된 이유 첫 번째, 아들이 없던 진평왕 선덕여왕의 아버지는 진평왕입니다. 진평왕에게는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진평왕이 죽고 난 후 딸인 선덕여왕이 즉위하게 됩니다. 두 번째, 성별보다 중요한 신분제도 신라에는 골품제라는 신분제도가 있었습니다. 이것에 따르면 신라는 '.. 2019. 6. 24.
[역사] 신라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들어간 이유 신라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들어간 이유 마의태자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입니다. 하지만 마의태자는 아버지의 뜻에 반대하며 개골산(금강산)에 들어가서 남은 여생을 보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경순왕과 마의태자 마의태자의 아버지인 경순왕은 신라의 마지막 왕입니다. 즉, 신라는 경순왕을 마지막으로 나라가 없어졌다는 얘기입니다. 이때의 신라는 왕권의 약화, 호족의 등장, 농민반란 등으로 이미 나라의 운명이 끝날 위기였습니다. 또한 궁예와 견훤이 등장해 후고구려와 후백제를 세워 후삼국이 되었던 시기였죠. 여기에 경순왕은 견훤이 신라로 쳐들어와 경애왕을 죽이고 세운 꼭두각시 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경순왕이 나라를 이끌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후백제에서는 견훤의 아들.. 2019. 6. 12.
[역사] 세종대왕이 셋째 아들인데도 왕이 된 이유 세종대왕이 셋째 아들인데도 왕이 된 이유 우리나라 역사 중에 제일 위대한 왕을 꼽는다면 많은 분들이 제일 먼저 세종대왕을 생각하게 됩니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제하였으며 과학 기술과 문화 발전에 힘썼고 북쪽으로 4군 6진을 개척하여 현재 한반도의 국경선을 만들었습니다. 이만큼 많은 업적을 남긴 세종대왕은 사실 왕이 될 수 없었습니다. 조선은 장자 계승이 원칙이었으며 세종은 태종의 셋째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셋째 아들인 세종대왕이 어떻게 왕이 될 수 있었을까요? 양녕대군 '이제' 태종의 첫째 아들은 양녕대군입니다. 양녕대군은 어린 나이에 왕세자에 책봉되어 왕이 될 준비를 착실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격이 자유분방하여 엄격한 궁 생활을 적응하지 못했고 사냥을 좋아하고 기생과 어울려 놀아 태.. 2019. 5. 31.
[역사]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한 이유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한 이유 이번에는 어린 나이에 즉위해 비운의 왕이 된 단종과 끝까지 충절을 지킨 사육신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단종과 수양대군 세종의 첫째 아들인 문종은 몸이 약하고 병이 있어 왕위에 오른 후 오래 버티지 못하고 2년 만에 세상을 떠납니다. 그 후 문종의 아들인 단종이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어린 조카가 왕이 되자 세종의 둘째 아들이며 문종의 동생인 수양대군은 왕이 될 기회를 노렸고 계유정난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합니다. 위협을 느낀 단종은 얼마 지나지 않아 왕위를 수양대군에게 넘겼고 수양대군이 왕의 자리에 오르니 그가 세조입니다. 사육신과 단종 복위 운동 사육신은 계유정난으로 권력을 잡은 세조를 몰아내고 단종의 복위를 계획하다가 목숨을 잃은 충신을 .. 2019. 5. 22.
[역사] 임진왜란 당항포해전에서 활약한 기생 월이 임진왜란 당항포해전에서 활약한 기생 월이 기생 월이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임진왜란 초기 당항포해전에서 조선군은 크게 승리했는데 여기에는 기생 월이에 대한 전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럼 기생 월이가 어떻게 활약을 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당항포 해전 당항포 해전은 임진왜란 때인 1592년 6월 5일~6일 동안 전라좌수사 이순신, 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의 수군이 고성의 당항포 앞바다에서 왜선을 격파한 해전입니다. 이전 당포해전에서 승리를 했던 조선 수군은 주민들로부터 당항포에 왜선이 정박해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고 당항포로 진격하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적이 육지로 도망할 것을 염려하여 바다로 유인한 후 포위하였고 거북선을 앞세워 왜선 26척을 격파하는 등 크게 승리하였습니다. .. 2019. 5. 13.
[역사] 고려 시대 무신정변이 일어난 이유 고려 시대 무신정변이 일어난 이유 고려 시대 때 무신은 차별을 많이 당했습니다. 무신들은 승진을 하기도 쉽지 않아 높은 관리가 되기도 어려웠고 군대의 높은 위치도 문신들이 차지해 그들의 통제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무신은 항상 문신에게 무시를 당하였고 참다못한 무신들은 1170년 난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는데 이것이 무신정변입니다. 무신정변이 일어난 결정적인 이유 무신들은 높은 관직에 오르기도 쉽지 않았고 항상 무시를 당했습니다. 왕과 문신들이 잔치를 열 때면 끝날 때까지 밥도 못 먹고 경비를 서야 했습니다. 이러한 일들로 무신들의 불만이 커져갈 때 결정적인 사건이 생깁니다. 당시 고려의 왕은 의종이었는데 의종이 신하들을 이끌고 나들이를 떠납니다. 쉬는 시간 동안 무신들이 무예를 겨루는 수박희라는 놀.. 2019. 5. 5.
[역사] 위만조선은 고조선을 계승한 것이 맞을까? 위만조선은 고조선을 계승한 것이 맞을까? 이번에는 단군과 고조선, 위만조선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많은 분들이 단군조선에 이어 위만이 정권을 잡고 단군조선을 계승했다고 알고 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교과서에도 위만이 단군조선을 계승했다고 나와있습니다. 하지만 위만을 단순히 침략자로만 보는 견해도 많은데 그 이유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위만 위만은 중국 한족 출신으로 연나라 사람이며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친구인 노관의 부하였습니다. 노관은 유방에게 땅을 받아 연나라를 세웠는데 훗날 한나라가 땅을 회수하려 하자 흉노로 도망갑니다. 이에 갈 곳이 없어진 위만은 고조선의 준왕을 찾아가서 조선을 지킬 것이니 조선 땅에 살게 해줄 것을 요청했고 준왕은 위만의 뜻을 받아들여 서쪽 국경을 지키게 합니다. 위만은 .. 2019. 4. 24.
[역사] 백제 근초고왕은 정말 중국 요서까지 진출했을까? 백제 근초고왕은 정말 중국 요서까지 진출했을까? 백제의 전성기라고 한다면 근초고왕을 떠올리게 됩니다. 백제는 한강 유역을 기반으로 삼국(고구려,백제,신라) 중에 제일 먼저 전성기를 이루게 되는데 그 주인공이 바로 근초고왕입니다. 근초고왕은 마한을 정복하고 가야를 공격해 남쪽으로 영토를 넓혔으며 고구려를 공격해 고국원왕을 죽이고 북쪽으로도 영토를 넓힙니다. 그런데 근초고왕이 삼국을 넘어 중국지역까지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근초고왕의 중국 진출에 대해 포스팅해보겠습니다. 근초고왕의 요서 진출 '백제국은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천 여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 후 고구려가 요동을 공격해 차지하자, 백제는 요서를 공격해 차지했다. 백제가 통치한 곳은 진평군 진평현이라고 했다.' -송.. 2019. 4. 18.
[역사] 서동요와 선화공주 이야기는 정말 사실일까? 서동요와 선화공주 이야기는 정말 사실일까? 이번에는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서동요와 주인공인 백제 무왕, 신라 선화공주에 대한 내용을 작성해보려고 합니다. 서동요와 서동이야기 서동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실려있습니다. 앞전에 백제 무왕의 내용을 포스팅하면서 잠깐 소개했는데어떤 내용인지 좀 더 자세히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무왕은 어렸을 때 마를 캐서 시장에 내다 팔며 살았는데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고 신라로 건너가 아이들에게 마를 나눠주면서 자신이 직접 지은 노래(서동요)를 부르고 다니도록 합니다. 그 내용은 선화공주가 서동(무왕)을 몰래 사랑한다는 내용이었는데 이 노래는 궁궐까지 퍼지게 되어 신라 진평왕의 귀에도 들어갔고화가 난 진평왕은 선화공주를 궁에서 내쫓습니다... 2019. 4. 9.
[역사] 비류와 온조가 고구려를 떠나 세운 나라 비류와 온조가 고구려를 떠나 세운 나라 저번 글에서 비류와 온조의 아버지에 대한 두 가지 이야기를 알아봤습니다. (이전 글 - 비류와 온조는 정말 주몽의 아들일까? 참고) 이번에는 고구려를 떠난 비류와 온조가 어떻게 정착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비류와 온조가 고구려를 떠난 이유 비류와 온조는 고구려를 세운 주몽에 이어 왕위에 오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몽은 자신의 후계자로 부여에서 찾아온 아들 유리를 택했습니다. 고구려에는 비류와 온조의 어머니인 소서노를 따르는 신하들이 많았기 때문에 충분히 왕위를 놓고 권력 다툼을 할 수 있었지만 왕위를 포기하고 새로운 땅을 찾아 고구려를 떠날 것을 결심합니다. 그리하여 어머니 소서노와 비류, 온조는 자신들을 따르는 신하들과 백성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떠나.. 2019. 4. 4.
[역사] 단군신화 이야기는 정말 사실일까? 단군신화 이야기는 정말 사실일까? 곰과 호랑이 이야기로 유명한 단군신화 모두 알고 계시죠? 단군신화는 일연 스님이 지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단군신화는 신화일 뿐 사실은 아니랍니다. 우리나라 고조선의 시작을 신성하고 특별하게 보이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을 추가한 것이죠. 그렇다면 현실적인 단군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일까요? 이번에는 단군신화의 속뜻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단군신화 단군신화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늘을 다스리는 환인의 아들인 환웅은 인간 세상에 관심이 많아 지상세계에 내려가 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환인의 허락을 받은 환웅은 바람, 비, 구름을 다스리는 신하 등 무리를 이끌고 인간 세상으로 내려와서 다스리기 시작하였고 그러던 중 곰과 호랑이가 찾아와 사람이 되고 싶다고.. 2019. 3. 31.
[역사] 비류와 온조는 정말 주몽의 아들일까? 비류와 온조는 정말 주몽의 아들일까? 비류와 온조에 대해 알고 계시나요? 비류와 온조는 형제이며 온조는 백제의 시조입니다. 고구려에서 유리가 태자가 되어 왕위를 빼앗기자 비류와 온조는 어머니 소서노와 같이 고구려를 떠납니다. 그런데 비류와 온조의 아버지에 대해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그 두 가지 설이 어떤 것인지 알아보려고 합니다. 비류와 온조의 아버지는? 먼저 주몽의 아들이라는 설입니다. 주몽은 부여에서 왕자들을 피해 도망쳐 졸본 지역으로 가게 됩니다. 여기서 소서노를 만나게 되어 결혼하고 비류와 온조를 낳았습니다. 두 번째는 우태의 아들이라는 설입니다. 부여의 귀족이었던 우태는 소서노와 결혼하여 비류와 온조를 낳았지만 일찍 죽게 되었고 소서노는 부여에서 도망쳐 온 주몽과 재혼을 하게 .. 2019. 3. 27.
[역사] 백제 무왕의 아버지는 위덕왕일까? 법왕일까? 백제 무왕의 아버지는 위덕왕일까? 법왕일까? 예전에 했던 서동요라는 드라마를 보신 적 있으신가요? 서동요는 무왕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입니다. 드라마에서의 무왕은 위덕왕의 숨겨진 자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삼국사기에는 법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것이 맞을까요? 무왕 무왕은 백제 후기의 왕이며 아들이 의자왕입니다. 의자왕 때 백제가 멸망했으니 마지막 왕의 바로 전 왕이 되겠네요. 재위 기간 동안 신라에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으며 고구려와도 갈등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수나라와 접촉하며 고구려를 침략할 준비를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는 서동설화의 주인공입니다. 서동설화가 무엇이냐 하면 무왕이 어렸을 때 신라의 선화공주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신라의 수도로 가서 선화공.. 2019. 3. 22.
[역사] 신립이 조령을 버리고 탄금대를 선택한 이유 신립이 조령을 버리고 탄금대를 선택한 이유 이번에는 신립 장군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 많은 드라마들을 보면 꼭 신립의 탄금대 전투가 등장합니다.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했고일본군은 엄청난 속도로 한양을 향했습니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최후의 카드로 신립을 충주로 보냅니다. 신립이 탄금대를 선택한 이유 충주 부근에 도착한 신립은 조령까지 지형을 살핀 후 지형이 험한 조령(문경새재) 대신 탄금대를 선택합니다. 왜 신립은 탄금대를 선택했을까요. 첫 번째, 기병의 활용 신립은 북방에서 기병으로 큰 활약을 했기 때문에 자신 있는 기병으로 승부를 보려고 했습니다. 또한 일본군이 보병이니 기병을 이용한 전술을 쓰는 게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두 번.. 2019. 3. 12.
[역사] 신숭겸, 태조왕건과 고려를 구해내다. 신숭겸, 태조왕건과 고려를 구해내다. 평산 신씨의 시조이기도 한 장절공 신숭겸 장군을 아시나요?저는 예전에 태조왕건 드라마를 보며 신숭겸이라는 이름을 처음 알았고나라와 왕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던 그 모습이문득 생각나 포스팅을 해봅니다. 개국공신 신숭겸은 고려의 개국공신입니다.궁예가 점점 포악해지고 폭군으로 변해가자홍유, 배현경, 복지겸 등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918년 왕건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합니다.왕건이 처음엔 이를 거절하였으나 결국 설득되어고려를 개국하였고 신숭겸은 개국 일등공신에 봉해집니다. 공산전투 태조 즉위 이후 고려와 신라는 사이가 좋았습니다.후백제와도 큰 문제는 없었지만 고려와 신라가 연합이 되는 것을두고 볼 수 없었던 견훤이 신라를 공격함으로 관계가 악화됩니다. 927년 견훤은 신라를.. 2019. 2. 28.
[역사]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으로 도읍을 옮겨야 했던 이유 웅진천도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으로 도읍을 옮겨야 했던 이유 백제의 수도를 웅진(공주)으로 옮긴 왕은 문주왕입니다. 웅진으로 옮겼다고 해서 웅진천도라고 합니다. 왜 문주왕은 수도를 웅진으로 옮겨야 했을까요? 문주왕의 아버지는 개로왕입니다. 이때의 고구려 왕은 장수왕으로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죠. 장수왕은 도읍을 평양으로 옮기며 남진정책을 펼칩니다. 가장 큰 목적은 한강을 차지하는 거였죠. 한강은 삼국의 가운데에 위치해있으며 교통도 좋고 농사짓기도 좋아 세 나라 모두 한강을 차지하기 위해 많은 전쟁을 일으키곤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수왕도 한강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 준비를 합니다. 이와 관련해 삼국사기에는 도림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도림 이야기를 보면 장수왕이 도림이라는 승려를 백제에 첩자로 보냅니다. 바둑.. 2019. 2. 12.
[역사] 소수림왕이 선물한 고구려의 전성기 소수림왕이 선물한 고구려의 전성기 고구려의 전성기 때의 왕이라고 하면 보통 광개토대왕, 장수왕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소수림왕이 없었다면 고구려의 전성기가 불가능했다는 거 알고 계시나요? 소수림왕이 즉위하기 전 고구려의 왕은 고국원왕이었습니다. 고국원왕 때의 고구려는 정말 힘든 시기였습니다. 위로는 선비족이 세운 전연이 침략하였으며 밑으로는 근초고왕의 백제군이 침략하여 고국원왕은 평양성에서 전사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국원왕의 아들이던 소수림왕은 왕위에 오릅니다. 왕위에 오른 소수림왕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백제를 공격하고 싶었겠지만 고구려가 힘이 없는 것을 깨닫고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데에 힘씁니다. 제대로 된 복수를 하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한 것이죠. 소수림왕은 먼저 불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입니.. 2019. 2. 7.
[역사] 원균이 칠천량해전에서 전멸한 이유 원균이 칠천량해전에서 전멸한 이유 임진왜란의 휴전이 결렬되고 정유재란이 일어나기 전 이순신은 파직되어 압송되었으며 그의 대체자로 통제사에 원균이 임명됩니다. 원균은 이순신보다 나이도 많았고 경력도 많았기 때문에 상관이었던 이순신에게 항상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정유재란 발발 무렵 가토군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출정을 하지 않던 이순신의 뜻에 반대하여 출정을 해야 한다고 장계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이전 글 -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을 받아야만 했던 이유 참고) 통제사가 된 원균에게 조정은 출정하여 적을 물리치라는 명령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원균이 통제사가 되어보니 적의 본진으로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 알게 됩니다. 이순신의 뜻이 맞았음을 깨닫게 된.. 2019. 1. 29.
[역사]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을 받아야 만했던 이유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을 받아야만 했던 이유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일본군은 지상군과 해군으로 나뉘었으며 곧장 한양으로 진격할 계획이었습니다. 지상군이 금방 한양까지 진격한 것에 반해 바다에서는 이순신에 막혀 진격하지 못합니다. 이때 명에서는 지원군이 오게 되고 명과 일본은 휴전협상을 하게 됩니다. 일본군은 철수하였고 화의가 진행되었지만 결국 결렬되었고 159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재차 조선을 침략하게 되는데 이것이 정유재란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을 당한 때가 이 시기인데 전쟁에서 전승을 하고 있던 장군이 백의종군을 당해야만 했던 이유를 알아봅시다. 결정적인 이유는 일명 '요시라 사건'입니다. 정유재란을 일으키기 전 이순신이 두려웠던 일본은 이순신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 2019.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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